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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2009) : 감정의 안개

매직큐 2009. 11. 4. 22:48

파주 (2009) : 감정의 안개

파주 (2009) ☆☆☆

[파주]는 올해 또 다른 홍보 오류의 사례로 기억될 것이고 아마 그로 인해 가장 많이 피해를 입을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 본 영화는 불륜물로 선전되었지만 그와 달리 영화 속 두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금기의 선을 못 넘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그로 인해 파생된 모호함 속에서 그들은 이리 저리 더듬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이야기 속에서 예상보다 조용하고 느릿하게 점차 드러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 여러분들이 일단 기회를 주면 궁금해 하면서 이야기에 금세 몰입될 수 있고 거기서 나오는 감정적 파장은 상당합니다. 영화는 끝난 후에 머리와 가슴이 같이 더 빠르게 움직이게 합니다.



이야기의 7년 동안 기간이 어느 때인지 영화에서는 정확히 설명되지 않지만, TV 뉴스를 보면 90년대 후반쯤인 짐작할 수 있는 시점에서(나중에 알아 보니 1996년입니다) 김중석(이선균)은 학생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수배를 당하게 된 처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선배인 정자영(김보경)의 집에 숨어 있는데, 상세히 얘기되지 않지만 그녀의 남편도 운동권 활동 문제로 부재중입니다. 이런 동안에 그 둘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 동안 어떤 일이 터지게 되어서 중식은 그녀를 떠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또 다른 기독교적 죄의식의 드라마 영화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떠올랐는데, 본 영화의 장면도 그 영화의 한 두려운 장면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는 건 꼭 언급해야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 중식은 곧 파주의 어느 교회로 거처를 옮겼고 거기서 일하는 동안에 그는 최은수(심이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집에서 조만간 나가야 하는 그녀는 동생 최은모(서우)와 함께 살고 있고 은모는 중식이 공부방에서 가르치는 여학생들 중 한 명입니다. 나중에 중식은 은수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잠시 그는 그녀를 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잃어버리게 되고 그에 이어 중식은 은모의 보호자 역할로써 그녀와 함께 살게 됩니다. 한데 은모는 몇 년 후에 중식 곁을 떠나버렸고 그러다가 3년 후 그녀는 다시 그에게 돌아옵니다.

이렇게 전체 이야기의 윤곽이 대략 그려진 다음, 영화는 그 안에서 과거와 현 시점을 오고 가며 주인공들의 과거와 감정들을 하나씩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우린 그녀의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알게 되고(은모는 그에 관해 다르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중식, 은수, 은모 이 셋 간의 관계가 그 7년 동안 어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현 시점에서 그들이 뭘 느끼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계속 바뀌어가고 그리하여 처음 봤을 때보다 은모와 중식은 많이 달라 보이게 됩니다. 느린 페이스에도 불구하고 일단 관심만 기울인다면 이는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다보면, 안개 같은 속에서 헤매는 것도 부족해서 죄의식에 묶인 두 주인공들이 보입니다. 그와 목사(이대연) 간의 대화를 들어보면 신학교 교육을 어느 정도 받은 듯한 중식은 죄의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유형의 사람이고 그는 거기에 계속 묶일 팔자입니다. 불쌍하기도 해라, 그와 여자들과 관계는 처음엔 원만했지만 결국엔 죄의식이 걸림돌이 되거나 혹은 죄의식이 파생되니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에게 짊어져야 할 짐이 쌓여갑니다. 그는 이에 대해 뭔가 해야 한다고 계속 느끼고 있고, 그의 최근 일은 철거 현장에서 다른 주민들과 시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별 희망은 보이지 않아도 그는 목적을 위해 자신을 불리하게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은모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고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철들면서 서서히 그게 뭔지 감지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현 시점에서 그녀에게 그 과거의 일이 다시 파악되기 시작되는데, 여기서도 불분명함은 존재합니다. 그녀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었는지 인식하고 있을까요? 다 자란 그녀의 얼굴 뒤에는 뭔가 있지만 우린 그걸 잘 알 수 없습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별 생각 하지 않고 저지른 일들을 그녀는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이고 중식도 이들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파주]는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좋은 가운데 이를 둘러싼 분위기도 상당히 좋습니다. 이 둘의 감정의 오리무중 속에서 헤매는 걸 그리는 이야기는 영화에서 간간히 보여 지는 안개 깔린 배경과 함께 감정적 효과를 자아냅니다. 그리고 그런 안개 깔린 모습들은 현실 세계에 단단히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철거 현장은 어느 장면에서는 근사한 영화적 공간이 되기는 하지만,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면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과 살짝 겹칠 정도로 주인공들의 세상은 매우 사실적이기도 합니다.

본 영화에서 서우는 여주인공으로써 아주 훌륭한 연기를 선사합니다. 15세 중학생에서부터 22세까지의 모습을 그녀는 완벽하게 잡아내고 자막이 없어도 우린 어느 나이의 은모를 보고 있는지 금세 느끼고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엔 그저 철없는 단순한 소녀였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복잡한 캐릭터로 변신하는 과정을 서우는 우리에게 능숙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변화무쌍한 그녀의 연기에 이선균은 침착한 닫힌 연기로 정확하게 반주합니다. 중식은 겉으론 담담하지만 그 뒤에는 억눌러진 뭔가가 있습니다. 김보경, 심이영, 이대연, 그리고 이경영과 같은 다른 조연들의 연기도 역시 좋습니다.

[파주]는 헤매고 더듬는 동안에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하고 그러다가 잘못된 선택들을 내리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만드는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짙은 장막은 걷혀질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애초부터 적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으로 인해 자신들의 감정을 더 덮어버릴 사람들입니다. 각본도 맡은 감독 박찬옥은 불분명한 와중에서도 감정적으로 분명하게 느껴지는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었고 영화는 제 시선을 상영 시간 내내 붙잡았습니다. 이건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것으로 끝이구나 제가 생각 하는 순간 영화는 끝났습니다. 풍경이나 내면은 안개 끼었을지언정, 영화는 그 정도로 정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