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주에 세상을 떠난 에릭 로메르의 마지막 작품 [로맨스]를 2008년 가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살아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그의 연인이 여장을 한 그와 만나는 게 되는 데 이를 보는 동안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그저 옷만 바꾸었지 별다른 위장도 취하지도 않았는데 숙녀 분께서 그렇게 사랑하는 애인을 알아보지 못하니 실실 쪼갤 지경이었지요. 그 순간은 잠시나마였지만,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는 불행히도 1시간 넘게 그와 정반대이지만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설정을 계속 밀고 가서 제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코미디인지 주일 연속극인지 헷갈리는 이 영화는 로메르의 그 2% 부족한 작품의 재치와 유머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지경으로 웃기지도 않고 영리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로 위장한 여주인공이라는 영화 속 설정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저는 그걸 그다지 잘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다시피 잘 만 살펴보면 어른도 금방 꿰뚫어 볼 수 있는데, 더 속이기 어렵기 마련인 어린애가 어떻게 헤어스타일만 바꾸고 수염만 붙인 엉성한 위장에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넘어갔다고 가정한다 치더라도, 왜 그는 아버지가 등장하고 나니 처음에 봤던 ‘아줌마’가 안 보이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게 질문함을 통해 좋은 코미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영화는 그 뿐만 아니라 많은 가능성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서 싸구려 웃음이나 간간히 만들어 냅니다. 전 적어도 나중에 고백의 순간이라도 등장시켜서 설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면 했지만, 영화는 그런 기회마저도 팽개쳐 버립니다.
여주인공인 손지현이 갑작스럽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버지 연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가까운 사람들만 빼고 가능한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하는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그녀는 남자였는데, 자신의 신체에 그다지 편해 하지 않았던 그는 성전환 수술로 이제는 이나영만큼이나 예쁜 여성이 되었습니다(하리수 씨를 고려하면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집안에서의 강요로 들어갔을 의대 과정을 저버리고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몸을 바쳐서 지금은 잘 나가는 사진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우리가 지현을 접할 때 그녀는 영화 촬영장에서 스틸 사진을 찍는 일을 하고 있고, 촬영장에서 일하고 있는 순정파 스타일의 애인 준서(김지석)와의 관계도 잘 진행돼가고 있는 편이지요. 단지 그녀의 과거를 알려주지 않은 게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언젠가 사실을 털어 놓을 예정이었지만 계속 머뭇거리는 와중에서 그녀에게 난데없이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최근 9살 생일을 맞은 소년 유빈(김희수)이 친아빠를 찾는다고 하는데 문제의 친부는 다름 아닌 지현입니다. 곰곰이 돌이켜 보니 그 옛날 의대생 시절에 어쩌다가 학우와 관계를 가졌는데 하필이면 그 때 그녀(지현이 아닙니다)가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혼자서 애를 키우다가 최근 그들의 선배 민규(이필모)와 결혼했지만,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줄 민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 유빈은 예전처럼 계속 친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부모님 몰래 이름과 주소를 손에 넣어 지현의 집을 찾아 온 것이지요.
[과속 스캔들]과 [트랜스아메리카]를 버무려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이 상황 아래에서 지현은 유빈을 할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참 편리하게도, 민규는 일본에 ‘학술 마시러 간’ 가운데 유빈의 어머니는 시골에 봉사활동 하러 내려갔으니, 원래 일주일 간 여름 캠프에 들어가 있어야 할 유빈은 홀로 남은 신세이고 이에 딱한 감정이 든 지현은 그를 집 안에 머물게 하지요. 한데, 그냥 생판 모르는 아줌마 역할만 해도 될 걸 아들 일기장을 보고 마음이 동해서 그녀는 아버지 역할을 하기로 작정합니다. 적당한 핑계를 대서 가짜 시체와 분장에 전문가인 준서의 도움을 받아서 그녀는 유빈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는 아버지로 변장해서 그 앞에 등장하지요.
이렇게 변장이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믿음직한 장르 도구가 있지만, 영화는 코미디에 관해서는 심각할 수준으로 나태합니다. 매일 변장된 상태에서 출근해서 변장을 벗고 일하고 다시 변장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거기서 내내 변장을 유지하는 과정은 생각만 해도 복잡할 것 같은데, 각본은 그에 도무지 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출근과 퇴근만 잘 하면 그걸로 끝인 양 영화는 이를 한두 번 반복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아들 앞에서 위장을 내내 유지하는 과정에서 좋은 농담들을 뽑을 수 있다면 저도 설득력 없는 설정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유일하게 재미있는 부분은 아버지(?)와 아들이 목욕탕 입구를 지나칠 때였습니다. 그들은 밤에 함께 침대에서도 자는데,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자면 어린 애들은 가슴과 유방을 감지하고 구별하는데 있어서 영화와 달리 그렇게 순진하지 않습니다.
이나영은 여자일 때가 가장 좋습니다. 남장 연기에 관해서는 완전히 좋지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김희수와 함께 괜찮은 순간들을 만들어 갑니다. 하지만 그녀가 과거 시절 지현의 모습을 연기하는 장면들은 혹시 그녀가 [아임 낫 데어]의 케이트 블란쳇을 흉내 내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줍니다. 영화 홍보지는 김희수를 제2의 왕석현이라고 하지만, [과속 스캔들]보다 한참 떨어지는 이 영화는 그런 가능성만 보여주지 이 좋은 아역배우를 잘 사용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로봇처럼 조종했다가 결국엔 저버립니다. 김지석, 이필모, 김흥수, 김희원과 같은 조연 배우들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바로 전에 본 [웨딩 드레스]처럼 본 영화도 주변 캐릭터들을 너무나 신경을 쓰지 않았고 워낙 성격묘사가 얄팍하다 보니 조연 배우들에게도 그다지 할 일이 많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즘 들어 제대로 된 국내 코미디들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작년 이 때쯤에 좋은 반응을 받았던 [과속 스캔들]에게 제가 야박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고 있습니다. 여전히 전 그 영화 후반부를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영화는 신선하지 않은 설정에도 불구 부지런히 저를 웃겼습니다. 반면에 이 설정에 성전환자라는 소재만 섞은 이 영화는 김빠진 소리나 나기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야기상의 가장 중요한 고민을 얼렁뚱땅 맺어 버려서 절 실망시켰습니다. 그리고 소재에 대해 진지하게 굴려고 하다 보니 웃음도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고 진지할 때조차 고작 캐릭터들로 하여금 TV 연속극 대사들이나 읊게 하고 피아노 연주를 곁들이는 촌스러운 모습만 보입니다. 당연히 감추는 과거야 드러나지만 어찌 이렇게 답답하게 통속적입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를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아이디어가 없다면 차라리 그 유명한 결말 대사를 훔치기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P.S.
제목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전환을 아직 안 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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